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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적 경험의 공유를 유도하는 일상의 풍경들

 

서지선은 카페나 바와 같은 실내 공간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도시의 공간에서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평범한 사람들과 물건의 모습을 바탕으로 평면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렇게 작가가 살고 있는 동시대 도시 공간의 이곳저곳에서 활동하는 대중들의 평범한 모습을 마치 스냅 사진처럼 포착하는 작업방식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도 즐겨 사용한 방법이다. 인상파 화가들의 시각은 도시생활의 활력을 반영하고 당시의 현실에 대한 긍정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 관점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의 배경은 산업화와 도시화에 의해 빠르게 발전하는 자신들의 생활환경에 대한 희망을 반영한 시각적 반응이라고 설명할 수 있으며, 형식상으로는 사진의 발명과도 연관시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상파 화가들이 포착한 대중들의 모습은 우리 망막이 포착한 그 순간의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재현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그러한 효과를 위하여 인상파 화가들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대상을 화폭에 담으려고 노력했었다는 점이 서지선의 작품과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인상파 화가들의 방식과 달리 서지선은 자신이 방문했던 장소를 사진으로 담아서 그 이미지들을 흑백 이미지로 바꾼 뒤 그 속에서 화면에 도입될 이미지들을 작가의 시선으로 걸러서 재현해낸다. 이렇게 해서 화면에 도입되는 인물들과 사물들은 그 이름과 정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불특정한 존재이지만 작가 본인에게는 특별한 경험과 추억을 담은 시각적 기록물들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으로는 평범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이중적 아이덴티티를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서지선은 작가의 사적 경험과 기록에서 출발한 이미지의 가공을 통해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며, 이 때 시각적 조형 요소의 중요한 부분인 선과 색채가 작가 개인의 고유한 표현형식을 거치면서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형태로 제시된다. 우선 형태에 있어서 서지선은 사람과 사물의 윤곽을 사실적인 밑그림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작가가 의도하는 드로잉을 통한 대상의 표현은 단순히 사실성을 재현하는데 있지 않고 앞으로 적용될 색채를 수용하는 색면을 구획하는 단순화된 추상적 화면일 수도 있고 사실적 형태를 충실하게 묘사하기는 하되 새로운 해석에 의해 표현될 또 다른 차원의 형태를 준비하는 드로잉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지의 채집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공간을 분할하여 바라보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사진기의 뷰파인더를 통해 포착되는 장면에서 작가는 다양한 형태와 풍부한 색채를 접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은 작가의 고유한 시각을 통해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화면 안에 구획되고, 포착된 장면 속의 개별적인 인물들과 사물들은 작가의 총체적인 시각에 의해 전체 화면의 부분으로서 각각 제자리와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형태와 더불어 색채에 있어서도 서지선은 사실주의적 재현을 위한 색채를 선택하기보다는 전체 화면의 조화와 안정, 주제의 친근함과 표현의 간결함 등을 고려한 채색방법을 선택한다. 작가는 평면적 색채효과를 얻기 위하여 마치 종이를 잘라 붙여 놓은 듯이 얼룩이 지지 않도록 하는 채색방법을 공들여 수행한다. 서지선이 원근법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화면에서는 색채 원근법적 화면 구성 역시 때때로 무시되고 오히려 파스텔 톤이 지배하는 화면 안에서 색면과 색면 사이의 관계와 조화가 강조되는 표현이 시도된다. 따라서 서지선의 작품에서는 사실적인 색채와 비사실적인 색채가 나란히 병치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색채의 충돌효과도 발생하게 된다. 서지선의 말에 따르면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파스텔 톤의 색은 차분하고 세련된 표현으로 의도된 것이다. 작가는 비슷한 톤의 색채들을 배치함으로써 경쾌한 느낌을 표현하고 가끔씩 드러나는 보색의 표현을 통해서는 화면에 활기와 에너지를 불어넣기를 희망한다.

서지선은 작품의 성격상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소재를 발굴할 필요가 있는 작가다. 그리고 실제로 작가 자신도 국내외의 여행을 즐겨하는 편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도 작가와 필자는 지난해 가을 런던의 어느 숙소에서 약속하지 않고 우연히 만난 적도 있었다. 따라서 필자는 서지선의 작품 중 일부에서는 작가가 체험한 공간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장소에서 공유함으로써 보다 직접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개인적인 행로의 기록으로서의 서지선의 작품은 특정 장소의 특정 시간을 공유한 사람들과의 폐쇄적인 공감과 소통도 가능하지만, 작가가 가졌던 순간의 느낌과 인상을 사진으로 기억하여 평범한 드로잉과 가볍고 편안한 파스텔 톤의 색조로 풀어낸 작품으로 탄생시킴으로써, 비록 작가와의 동행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어도 보는 이들로 하여금 편안한 느낌을 받고 작가의 여행의 행로와 그 중간에서 갖게 되는 다양한 경험을 간접적이나마 어렵지 않게 공유하고 공감하는 정서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가 바로 서지선의 작품이 갖는 대중적 친화력의 바탕이 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하계훈(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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